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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동의 딸기퐁듀
학부생 시절 나는 주로 밥값이 제일 싼 헬렌관, 포스코관 등지에서 밥을 먹었다. 3000원대에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정문 앞 주먹밥집이나 프레첼집의 단골이기도 했다. 첫 학기엔 뭣 모르고 친구들 따라 비싼 브런치도 사먹고 커피도 사먹었다. 일찍 철이 든 2학기부터는 줄곧 혼자 밥을 먹었고 커피값을 아껴 생활비에 보탰다. 돈도 시간도 알뜰히 쓰던 그 생활습관과 취향은 나와 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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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락의 겨울
겨울 내내 고무줄 바지에 검정 패딩을 입고 지냈다. 아무리 부산이라 해도 영하의 날씨에 바닷바람 강바람 맞으며 자전거로 출퇴근했기 때문에 멋은 사치였다. 페달 밟으며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들으며 잠을 깨웠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도착하면 전등을 켜고 창문을 열고 명상하고 스트레칭하고 조성진의 라벨을 들으며 일기를 썼다. 센텀시티나 강남이나 음식이 별로인 건 매한가지라, 점심은 주로 영상센터 구내식당의 6000원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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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당의 네임드
나는 나로 살면서 사랑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하는 파라노이아가 있다. 스스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고질적인 지병의 합병증이다.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해 즙짜듯 셈쳐본 것 외에, 사랑 그 자체에 대해 실컷 고민하고 이야기해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리고 그런 얘긴 어디서 누구와 하나.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타령에 킹받는 건조한 삼십대, 셀프러브에 분주한 싱글이 되어 있다. 비대한 외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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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의 킥
겨울의 끝자락에 여름나라에 다녀왔다. 여름나라에서 자연에서 난 것들 잔뜩 먹고 겁없이 해에 맨얼굴을 내놓았다. 돌아와서 보니 새삼스레 몸과 얼굴이 관리대상이 되어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몸을 받아들여라, 자연과 싸우려고 하지 말아라. 지성인답고 점잖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치앙마이 야시장 한켠의 과일가게에서 4000원에 망고 세 개를 사면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듯한 청년들이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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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호연지기
25년 1월 1일자로 임명된 정계선 헌법재판관은 서울대 의예과 1학년 재학 중에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 진로를 변경해 서울 법대에 재입학했고, 사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했다. 서울 법대 재학 시절엔 학생운동을 했고, 법관이 되어서는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수한 뒤 헌법연구관을 지냈고, 공직비리, 뇌물 등 부패사건을 전담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 재판장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징역 15년, 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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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의 수치, 세종의 고양
영화는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다. 전공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자격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시간은 고밀도로 흐르고, 시선을 빼앗긴 우리의 시간은 성글게 흐르므로 – 인생을 다 바쳐도 영화의 시간에 닿기엔 모자랄 것이다. <시네마 천국>의 영사 기사 아저씨가 괜히 화마에 눈을 잃은 게, <파벨만스>의 보리스 삼촌이 괜히 가족의 수치가 될 것을 경고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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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의 뒷걸음질
몇년 전 어느 눈 내리던 날, 만나던 남성에게 “너 전장연이야?”란 말을 들었다. 거기 그 맥락에서 ‘전장연’은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생떼 쓰는 사람을 모욕하는 의미로 쓰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무의미한 언쟁으로부터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아무리 사는 게 고되어도 언어와 생활을 맑게 고집하고 싶고, 맑은 사람을 사귀고 싶다. 공익활동에 대해 걱정을 가장한 경고를 자주 듣는다. 내 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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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동의 에피파니
나의 가정환경과 타고난 성정, 그리고 취향은 너무나 온건해서, 고학하(고액 영어과외로 학비를 버)는 십년 정도 가난을 전유한 시간으로 내 자격지심의 모양을 빚었다. 경상도 미들 클라스의 자랑으로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결과로, 계급투쟁에 핏대를 올리는 와중에도, 내 내면의 보수성에 속으로 움찔움찔하곤 했다. 오늘 오후, 동생이 고삼 때 입던 시꺼먼 패딩을 입고 부산 센텀의 거대하고 기괴한 피노키오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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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의 적당한 실례
아빠는 여행을 싫어한다. 초록병의 묘약(소주)만 있으면 되는 파티 애니몰이기 때문이다. 워라밸과 소확행의 창시자가 본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여기에 천국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으니 – 짐 싸고, 비행기 타고, 잠자리가 불편한 고생이 싫을 만도 하다. 운동선수 시절 시합과 전지훈련을 하도 다녀서 지겹다고도 했었다. 그런 아빠가 격년에 한번 정도 가족 여행에 동참하는 때가 있다. 몇해 전 가족끼리 평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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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의 짜이
인도의 길거리에서 짜이를 시키면 집집마다 다른 비율로 인도식 향신료를 넣은 차를 소량의 물에 팔팔 끓인다. 김을 한참 내 진한 엑기스처럼 되면 우유를 들이붓고 냄비째 파르륵 끓인다. 전용 잔은 붉은 진흙으로 대충 빚어 유약도 바르지 않고 구운 것을 쓴다. 높은 곳에서부터 드라마틱하게 내려 부어주는 루틴, 그 향과 꼴, 색 모두가 퍼포먼스다. 우유 거품을 낸 밍밍한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