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릉의 짜이

인도의 길거리에서 짜이를 시키면 집집마다 다른 비율로 인도식 향신료를 넣은 차를 소량의 물에 팔팔 끓인다. 김을 한참 내 진한 엑기스처럼 되면 우유를 들이붓고 냄비째 파르륵 끓인다. 전용 잔은 붉은 진흙으로 대충 빚어 유약도 바르지 않고 구운 것을 쓴다. 높은 곳에서부터 드라마틱하게 내려 부어주는 루틴, 그 향과 꼴, 색 모두가 퍼포먼스다.

인도 길거리의 짜이 퍼포먼스

우유 거품을 낸 밍밍한 차이 라떼나, 미지근한 우유를 부은 잉글리시 티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뜨겁고 진하다. 호로록 마시고 나면 잔은 바닥에 깨트려 버린다. 최소한으로 가공된 흔해터진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새삼스러워 탄성을 질렀다. 나도 모르는 새 – 매끈한 물질문명, 부자 나라의 촌놈이 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기원을 찾아보니 좋은 차는 영국이 다 가져가고 인도의 서민들에겐 하품의 차만이 남았다고 한다. 카페인 함량을 높이기 위해 찻잎을 물과 함께 끓이고, 각종 향신료와 설탕을 넣어 맛을 냈다. 아닌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영국 놈들에 대한 조크를 들었다. 물질을 수탈해도 정신까지 박박 긁어가진 못한 모양이다. 저력 있는 사람들은 결핍에 굴하지 않고 더욱 더 창조한다.

공항에 마중나온 인도인 친구는, 환영한다, 너흰 곧 어쩔 수 없음 – HELPLESSNESS를 배우게 될 것이다, 라고 했었다. 2024년엔 그 말을, 대혼돈 가운데의 질서를 자주 떠올렸다. 중진국에 태어난 우린 하면 된다고만 배웠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저성장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이 깊게 새겨졌다. 어쩔 수 없음의 엄정함을 배울 때다.

이상하게 가장 추운 겨울이 되면 지글지글한 짜이의 온도가, 흙잔 맛이 밴 짜이 향이 혀끝과 코끝을 동그랗게 맴돈다. 긴 긴 겨울밤은 계절과 시간이 다르고 빛이 다른 장소들을 꿈꾸며 애써 잠재웠던 탐험심, 호기심을 깨우는 시간이다. 그리고 다음엔 라다크를, 아니, 오만이나 요르단을 함께 여행하자던 약속이 떠오르는 것이다.

내 인디언 친구와 그의 친구들은 여러 형제들과 친척들, 친구들 틈에서 품이 넓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리도 그들의 시선은 미래에 가 있는 듯했다. 미래에 일말의 기대나 낙관이 붙어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한국에선 이미 미래가 지나가고 있음을 감각했다. 이래서 유럽의 젊은이들이 아시아를 떠도는구나. 나라가 늙어버려서. 활력을 잃어서. 미래가 없어서.

내가 깜깜히 모른다는 것을 아는 수고, 이성이 논하기 전에 감각이 깨닫는 각성의 경험이 갈급하다.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그를 통과해 수정되고 결정結晶되는 고유의 관점이. 하늘에 기름을 뿌려대는 죄, 소박한 일상을 내팽겨치는 죄, 생활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죄를 감수하고서 또 다시 객꾼의 충동이 일어나니 – 역마를 타고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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